소박함을 간직한 신앙 공동체, 김성우 성인의 고향 |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 387-10 |
경기도 하남시 미사강변북로 99 |
(031)792-8540 |
(031)792-8531 |
http://www.gusansungji.or.kr |
gusan-hl@casuwon.or.kr |
하남시 향토유적 제4호 |

마을을 둘러싼 뒷산이 거북이 형상을 닮았다는 구산(龜山) 마을은 팔당 부근 한강변에 위치하며 순교자들의 숨결이 170여 년이 넘도록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서울에서 불과 1시간 내에 시원스레 뚫려 있는 강변도로와 중부 고속도로를 통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교통상의 편리함도 구산 성지를 찾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요소이다. 구산 성지 또는 구산 마을이라고 할 때 어느 곳을 말하는지 잘 모른다고 해도 미사리 조정 경기장 하면 “아, 그곳!” 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경기도 하남시 망월동에 위치한 구산 마을은 먼저 103위 한국 순교성인 중 한 분인 김성우 안토니오(金星禹, 1795-1841년)를 비롯해 박해 시대에 많은 순교자가 탄생한 유서 깊은 사적지라는 데서 그 교회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특히 구산 마을은 김성우 성인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오며 순교자들의 묘소를 가족 묘지에 이장 · 보존해온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박해 시대의 자취가 가장 원형대로 남아 있는 곳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갖고 있다. 더군다나 200여 년 동안 교회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확고하게 지켜온 교우촌으로 도시화로 인한 급변속에서도 한마음으로 신앙 안의 일치를 잃어버리지 않고자 노력해 왔다.

6.25 전쟁 당시 구산 마을은 원로 신부들의 피신처로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낮에는 곳곳에 무성하게 자란 사람 키보다 더 큰 갈대숲 사이에서 숨죽이고 엎드려 있다가 저녁에 살금살금 나와 지친 몸을 쉬었다고 한다.
쭉 뻗은 강변도로와 그 아래 미사리 조정 경기장은 구산 마을을 향하는 순례자들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하지만 정작 도로 건너편 구산 마을은 도시화의 풍랑 속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모해 시골 성당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구산 성당이 소리 없이 파묻힌 형국이 되었다.
게다가 1836년 모방 신부가 설립한 구산 공소를 모태로, 1979년 신장 성당에서 분리 · 승격해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생가터에 설립된 구산 성당과 그 인근 부지가 2009년 시작된 ‘미사 보금자리’ 재개발 사업에 포함되어 이전을 강요당했다. 무분별한 경제논리에 역사적 가치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성당 존치를 위해 노력한 구산 성당은 201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말까지 옛 성당의 원형을 보존한 상태로 220m 가량 떨어진 새 부지로 성당을 통째로 옮기는 대역사를 이루어냈다. 국내에서 최초로 콘크리트 건축물을 하루에 10m 정도씩 옮기는 이전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교우촌의 역사와 문화재적 가치를 지키는 좋은 사례가 되었다.

구산 성당에서 걸어서 15분 남짓 거리에 조성된 구산 성지 또한 무분별한 개발과 도시화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다. 1980년 로마 교황청이 세계 순례성지로 지정하고, 2001년 그 역사적 ·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경기도 하남시 향토유적 제4호 지정된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순교자 8명이 출생 · 순교한 후 묻힌 곳이며, 최근까지도 그 후손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하지만 현재 성지를 포위라도 하듯 고층 아파트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야트막한 언덕 모양의 성지 정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형형색색의 도자기 작품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상(성모자상)이 보인다. 독특한 외형의 ‘우리의 도움이신 성모 마리아상’은 구산 성지 초대사제인 고(故) 길홍균 이냐시오(1931-1988년) 신부가 꿈에서 본 성모님의 모습을 토대로 고 김세중 프란치스코(전 서울대학교 미대 학장) 화백이 조각해, 지난 1983년 축성된 것이다.

성모상과 함께 성지 안을 돌아보면 오른쪽으로 ‘안당문’(安當은 안토니오의 중국어 음역)이라 적힌 자그마한 기와 대문이 보이고, 그 안으로 순교자 묘역과 성당이 보인다. 순교자 묘역에는 김성우 성인과 2015년경 가족 묘지에서 모셔온 순교자, 구산 출신 순교자 등 9위의 무덤이 진묘와 의묘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숙연한 마음을 가다듬고 안당문을 들어서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과 순교자들의 묘소 앞에서 잠시 눈을 감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게 신앙을 택했던 그들의 풍모를 그려본다.
양반의 자제로 태어나 유복한 살림과 존경받는 가문에서 남부러울 것 없었던 김성우가 신앙의 험로를 걷기 시작한 것은 1830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경주 김씨 계림군파(鷄林君派)의 15대 손인 김영춘의 맏아들로 정조 19년(1795년) 구산에서 태어난 그는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그는 1836년 모방(Maubant) 나(羅)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방 신부를 모시기도 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던 그는 1840년 1월경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그는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요지부동의 굳은 신앙에 결국 그는 이듬해 4월 29일 47세의 나이로 순교했고,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가 마침내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당 왼쪽으로 청동 빛의 고색창연한 십자가의 길 14처상이 보인다. 굽이굽이 말려 올라간 소나무들의 푸른빛이 십자가를 진 예수를 향해 시퍼렇게 날선 창을 겨눈 병사들의 청동 빛에 어우러져 섬뜩할 정도로 처절했던 순교 당시의 고통을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성지 한 가운데는 넓은 잔디광장과 야외제대가 마련되어 있고, 그 뒤로 성지와 관련된 순교자들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세운 기둥들이 묵주기도 길 사이로 높이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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